2011년 7~8월(제50권 4호 통권 535호) : 회원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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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소금밭을 옥토로 개간
이 영 호 통일회원
부산 사하구 지회장
경남 창녕군 남지고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나는 재래식 농사만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워 금속회사에 취직도 했었지만 나의 길은 농업이라는 생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영농일지도 꾸준하게 써왔으며, 지금의 사하구 하단동 갯벌 땅을 빌려 소규모 채소농업을 시작한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첫걸음이었다.
20대 때부터 가장으로서 요절한 두 형의 유자녀를 돌보아야 했으며, 집안의 명예와 지위를 지키기 위해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사단법인 한국대학 교수새마을연구회에서 발간한 "천하의 큰 농사꾼 이영호"의 머리말에 보면 "우촌이라는 아호를 가진 이영호씨는 소처럼 양순하고 힘이 세서 부산지역사회에서 묵묵히 일하는 농사꾼이다"라고 쓰여 있듯이 열심히 농사에 매진하여 석탑산업훈장, 새마을훈장, 농업기술상, 한국농어민대상 등 50여개의 크고 작은 상을 받았다.
1975년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소금기가 배인 부산 사하구 장림동 황무지 20만평을 손수 피땀으로 개간하여 천신만고 끝에 농토로 개간하는데 성공했다. 사하구 공업단지 주변의 버려진 황무지 개간에 도전하자 이웃 농민들은 소금바닥인 갯벌개간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며 미친 사람, 망상에 젖은 사람 운운하면서 차가운 멸시의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농토로 개간하는데 성공하자 이를 본 주위사람들은 감탄과 경의의 눈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개간한 토지 중 18만평을 인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고 나머지 2만평에 우리 부부는 다시 한 번 더 비장한 각오로 퇴비와 석회석을 쏟아 붓고 수십 번 농토를 갈아엎어 염분제거에 완전히 성공을 거두어 옥토로 변화시켰다. 20만평이 부산근교 시설단지로 발전되어 시금치, 겨울초, 배추, 무 등을 대량으로 출하함으로써 소득 천만원을 실현시켰는데 시금치가 주 소득원이었다.
처음으로 얻은 농사수익을 재투자하여 비닐하우스를 1,000평으로 확대하고, 상추와 쑥갓으로 작목을 바꾸어 재배한 결과 불티가 날 정도로 시장에서 인기를 얻어 농사에 대한 꿈이 부풀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의 끝없는 도전은 계속되었다.
1976년 부산 사하구 하단동 새마을지도자로 위촉되고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부산시로부터 농지를 임대받았다. 비닐하우스 700평으로 채소원예를 시작했다. 농사꾼도 잘살 수 있다는 것을 주위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새벽 2시에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억척같이 농사일에 전력투구했으며, 100% 퇴비를 이용하여 재배한 수박과 무 농사가 성공하자 농사도 정성을 쏟고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면 수익사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되었다.
1978년엔 부산 사하구에 채소원예단지 100만평을 개간하여 300명에게 공급, 연간 1천억원의 소득을 올리게 했다. 그동안의 영농체험으로 시금치 조기재배법(15일 조기수확 출하)을 개발하여 성공을 거두자 시금치재배 성공사례를 농민들에게 전파하여 200여 농가가 연 700억원의 수입을 올리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81년 12월 전국농업기술자협회 경영부문 본상 수상을 계기로 105회나 농민교육에 출강하여 연인원 7,600여명에게 체험한 영농방법을 교육시켰다.
끝없는 도전정신으로 일구어낸 김해농장은 현재 부산시 강서구 대저2동 등구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비닐하우스 16동(4,000평)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온난다습한 해양성 기후지대로 연간 강수량이 1,466㎜로 전국 평균 강수량을 웃돌고 연간 평균기온은 14℃로 따뜻해 겨울철 시설원예재배에 난방비가 필요 없는 유리한 특성을 갖고 있다. 4,000평의 비닐하우스에서 시금치 4기작과 토마토를 생산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고 있으며, 연간생산량은 1,000톤에 이르고 연간매출액이 2억원에 이르는 부농의 꿈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