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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4월(제48권 2호 통권 533호) : 컬럼 - 출중한 지도력과 업적, 영원한 큰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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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466회

본문

<칼럼 : 성천 류달영 박사 탄신 100주년 추모사>
출중한 지도력과 업적, 영원한 큰 스승
= 성천 류달영 박사의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삶의 발자취를 되돌아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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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梅山房主人 白 甫
(본회 통일회원)
성천 류달영 박사는 경술국치(1910년)의 이듬해인 1911년(신해년) 5월 6일(음 사월초파일)에 이 땅에 생을 얻어서 2004년 10월 27일에 삶을 마감하고 대전 현충원의 독립유공자묘역에 잠들고 계신다. 향년 93세의 수를 누렸다. 오는 5월 6일은 성천선생의 탄신 100주년을 맞이한다.
되돌아보니 성천선생께서 서거하신지 어느새 7년의 세월이 흘렀고 서거 1주기에 제자들과 따르던 동지들의 뜻과 성금을 모아 농업기술진흥관에 흉상을 세운지도 6년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야말로 인생무상을 되뇌게 된다. 다시 뵙고 싶은 간절한 염원을 억제할 수 없어서, 또 다시 선생님의 고결한 발자취를 오염시키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1911년 이 땅에 생을 얻어서 21세기에 93세로 현충원에 잠드시다.
사람은 누구나가 부모로부터 생명을 얻어 태어나서 짧게 길게 삶을 꾸려가면서 한 나라와 한 가정의 역사를 발전시키고 축적하여 간다. 유구한 역사위에 영원히 그 이름이 살아 숨 쉬는 각 분야의 인물들을 나는 통 털어서 ‘스승’이라고 존칭하려고 한다. 성천선생은 겨레의 영원한 큰 스승으로 기억하여야 한다.
필자는 본고를 초하면서 우리협회의 (농업기술회보, 2004년 12월 제494호)와 (농업기술회보, 2005년 9․10월 제501호)의 컴퓨터의 파일을 다시 모니터에서 정독을 하여 보았다. 훗날 누군가 우리협회의 역사를 정리하거나 성천선생의 발자취를 조명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록 중에서 한 가지라도 밝혀 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천선생과 상허 유석창 박사와의 관계이다. 성천선생은 상허선생보다 나이가 12살 아래이시고 일제강점기에 태극기를 꽂을 하늘도 빼앗긴 시대에 상허선생은 의학을, 성천선생은 농학의 고등교육을 받으셨다. 해방될 때까지 걸어가신 행적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상허선생은 건국대학교를 설립하시고 성천선생은 개성의 호수돈여고에서 평범한 월급쟁이 교사생활을 하신 것이 아니라 ‘장차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매운 젖을 먹여서 나라를 찾는 일꾼을 길러내는 교육에 심혈을 쏟았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필자는 잘은 모르지만 양정고보시절의 은사이신 김교신 선생의 훈도와 영향을 받으신 것 같고 은사와 사돈의 인연을 맺기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은사인 김교신 선생이 주도한 ‘성서조선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돕고, 수원고농에 진학한 것도 은사의 지도였다는 말씀을 들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수원고농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그대로 제1수원고농사건, 제2수원고농사건 등 일제강점기에 학풍 그 자체가 민족정신이 넘치고 있었다. 성천선생은 해방직후에 모교로 돌아와서 정년 될 때까지 수많은 외부의 겸직과 다양한 사회운동을 해 오면서 결코 교편은 놓지 않으신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1961년, 성천선생은 재건국민운동을 맡은 사실은 군사 쿠데타와 따로 떼어내서 역사적인 평가를 해야 된다고 믿는다. 감이 나 같은 사람이 함부로 언급할 일이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재건국민운동이 정치권력과 분리된 후에도 순수한 민간운동으로 재출발한 후에도 온갖 정열을 쏟아 넣은 것을 재조명해 봐야한다.
 
상허선생과 성천선생의 농민․농업․농촌사랑과 나라사랑 정신은 일맥상통한다.
민간운동으로 재출발할 때 상허 유석창 박사는 성천선생을 돕기 위해서 상허선생은 재건국민운동의 ‘재정위원장’의 감투(?)를 쓰게 된다. 이 한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상허선생과 성천선생의 나라사랑, 겨레사랑, 농민사랑, 농업사랑, 농촌사랑은 사상과 의기가 일맥상통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성천선생은 건국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73부터 상허선생의 뒤를 이어서 우리법인의 총재로 취임하시고 서거하실 때까지 상허선생이 놓아주신 정신적인 초석과 이념을 단 한자, 한 구절을 고치는 일이 없었다. 4년 임기 5기, 20년에 걸쳐서 정체성을 지켜낸 분이시다. 작은 기업의 사장이, 크고 작은 단체의 대표가 갈리면 전임자의 업적이나 발자취를 지우는데 급급한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50년 전 30대가 80세 전후로, 40대는 90세 전후로 늙어서 유명을 달리하였다. 내 핸드폰의 전화번호부에 90대의 초창기 우리법인의 창립원로는 2~3명에 불과하다. 충북 음성의 남상돈 선생(96세), 충남 예산의 고중덕 선생(89세, 현 서울거주), 조재영 박사(96세)님은 명절 때나 한 달에 한두 차례 전화로 문안을 드린다. 언제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있다.
남상돈 선생님이 우리 농업기술진흥관의 계기를 만들어 주신 사실은 아는 사람이 이제 몇 분이 안 계신다. 남상돈 선생은 유신정권 때 유일한 농민대표로 의회에 진출하여 국의의원으로 활동을 하였다. 경기도 부천시 춘의동의 연초시험장(당시 전매청 산하)이 도시화로 이전을 하게 되었다. 이전후보지로 충북 음성이 결정되었으나 농지구입이 난제였다. 지금이라면 각 지방단체들이 서로 유치경쟁을 하였을 터이지만 말이다. 당시 음성은 전국 시군 중에서 군민의 소득수준이 1위의 지역이었다. 그러니 농지매수가 쉽지 않았다. 연초시험장의 장장은 성천선생의 제자로서 남상돈 의원에게 협조를 간청은하게 되었다. 남의원은 우리법인의 임원으로 농업기술진흥관의 건립운동을 익히 알고 계신 터라 부천의 연초시험장이 이전 후 그 건물과 부지를 농업기술진흥관으로 이용하는데 착안을 하게 되었다. 먼저 두 어른이 기본방침을 정하고 먼저 부천 연초시험장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시험장의 위치, 교통, 건물과 여러 시설 등 심지어 온실까지도 농민교육장으로 활용하는데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두 어른은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결론을 지었다. 음성의 시험장 부지매입과 농업기술진흥관의 매입을 연계하여 농민(대부분이 우리협회 회원들)들을 설득하는데 명분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설득에 나선 남의원은 성천선생이 음성에 오셔서 직접 설득도 해 주시고 남의원께서 응원해 주십사 하는 요청을 받고, 박갑수 사장(당신 법인의 부총재)의 고급승용차로 음성을 가실 때 성천선생을 모시고 필자도 수행한 일이 이제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음성의 연초시험장부지 매입과 부천의 시험장매입과 연계하여 농진관 건립추진
일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그러나 세금문제 등 국유재산 매매의 복잡한 수속절차에 성천선생은 지방국세청장에게 ‘당신네의 시험장의 부지를 매입하는데 우리회원들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했는데 무슨 세금이냐?’ 하고 당당하게 일갈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이 선하다.
거두절미하고 부천의 연초시험장평 건물과 시설의 감정가격이 너무 비싸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재원으로는 포기할 수밖에 없어서 시험포로 쓰던 나대지 2,660평(?)을 구입하였다. 이 밭을 관리하는데 사무국의 직원이 콩을 심어서 가꾸기도 하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지만 주거지인 이 땅에 농업기술진흥관을 지어서 농민들을 교육하는 시설과 건물을 짓는 것은 건축법상 불가능한 곳이었다. 우리협회는 이곳에 남상렬씨라는 영세건축업자에게 맡겨서 2층짜리 연립주택 122세대를 짓다가 10․26사태가 일어나자 건축업자가 감당을 못하게 되어서 2년여를 필자가 수십의 실무로 고생한 일은 잊을 수 없다. 그 수습으로 우리법인은 3억2천여만원(?)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이촌동에 농업기술진흥관이 들어서게 된 경위를 부연해서 기록으로 남겨주고자 한다.
1980년 당시 신군부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들 60(?)여명으로부터 당시 가액으로 600여억원(?)을 국가에 기부하는 형식으로 환수하였고 이 돈은 농어민후계자 육성기금으로 사용하였다. 이촌동의 농업기술진흥관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름이라 굳이 밝히지 않지만 기부 환수한 재산의 일부이다. 대지 500평(몇 평이 모자라는 면적)에 유치원으로 사용하던 바닥면적 200평의 단층건물이 있었다. 성천선생은 차류대종회(車柳大宗會?)의 회장을 역임하신 줄로 알고 있다. 이 유치원의 정보를 성천선생에게 제공한 분은 당시 토지개발공사의 류근창 사장이었다. 위치도 면적도 교통편도 우리법인의 재력으로 가장 적당한 건물로 성천선생은 판단을 하신 것으로 안다. 다른 자산은 2년 동안에 거의 처분이 되었으나 이곳은 알아보니 학교용지로 누가 매입해도 유치원이나 학교로만 이용해야 하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이미 부천 연초시험장의 경험이 있는데도 더 깊이 알아보지 못한 실무자인 나의 불찰이었다. 이 농어민후계자 육성기금은 농협이 관리하고 있었고 관리청인 농림부는 재원을 가지고 있는 우리법인에 매수를 적극적으로 권유를 하였다. 구두로 라도 유치원 용도를 해결해 주는 조건으로 매매계약이 성립이 되어 1982년 5월에 약 20년간 정든 건국대 농대의 농장사무실에서 우리 집을 마련하고 이사하였다. 상허농촌복지재단을 발기하고 13년만에, 통일회원제도로 농업기술진흥관 건립운동을 일으키신지 10년만의 기쁜 일이었다.
 
한강변에 우뚝 선 농심탑, 농진관을 긴긴 15년간의 소송에서 끝내 지켜내
다음 차례는 성천선생 수원고등학교의 후배이며 우성건설의 회장인 최주호 회장님(서울대학교 총동창회 회장 역임)을 강제(?)로 모셔 와서 부총재의 감투를 씌워드리고 농업기술진흥관의 증축 등 전문기술에 대한 자문을 받았다. 최주호 부총재님은 우리법인에서 자주 열리는 운영위원회에 바빠서 참석을 못하시면 간부직원을 대리로 참석케 하여 주신 성의와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첫 결정을 자금이 없어 기존의 단층을 3층으로 건축이 가능한가의 기술검토였으며 우성건설 기술진의 판단으로 증축이 결정이 되었다. 설계와 시공업자선정은 우성에서 지시하여 주었다. 그러나 학교용지를 시교육청에 신청하여 유치원이 폐교를 하면 끝나는 줄로 알았는데 아파트지구변경 등 중앙관서의 심의를 거쳐 분구중심의 ‘집회소’로 허가를 받는데 2년이 소요된 것이다. 농업기술진흥관은 200명을 동시에 수용하여 숙식 교육할 시설과 규모로 설계를 하는데 공간이 모자라서 현재의 지상 주차장 아래 지하에 식당(현 골프연습장)을 만들고 증축공사는 모두 최주호 부총재의 휘하 기술진의 아이디어와 작품이다. 준공검사를 얻어내는데도 그야말로 천신만고의 고비를 넘어야 했다. 어디 그 뿐이랴! 농업기술진흥관의 전소유주로부터 15년 동안 소송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런 소송이 또 어디 있으랴.
당시의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의 면면과 부정축재 내역을 30년이 지난 오늘 역사는 이들을 비웃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아무리 부정축재자들의 재산이라고 해도 유치원을 포함시켰다는 것은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 유치원의 원장이며 소송 당사자은 재산을 국가에 기부한 분의 제2부인(?)이다. 이사 오기 전에 인근의 주민들을 통해서 알아보니 이 유치원은 ‘귀족유치원’이란 별명이 붙어 있었다. 인근의 어린이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아침이면 내로라하는 권력층과 특권층의 자식들과 손자들이 자가용을 타고 온다고 하였다. 이런 유치원이라 해도 농민단체인 전국농업기술자협회의 간판을 달고 들어온다는 것은 인근 주민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주하자마자 ‘농심 어머니교실’을 개설하였다. 1주일 한차례씩 가사노동이 뜸한 시간을 골라서 가정원예, 베란다농업, 요리 등등 유명강사들을 초빙하여 무료강습회를 개설하였다. 처음에는 10여명이었으나 차츰 소문이 나자 강당에는 어머니들이 꽉 찼다. 특별행사로 코주부어묵공장과 서울인근의 우리회원의 농장을 계절을 봐서 견학하였다. 또 하나 수강한 어머니들의 서비스사업으로 서울․경기양계조합의 강희구 조합장 후원으로 계란을 싸게 팔았다. 독특한 판매방식은 낱개로 팔지 않고 저울에 달아서 중량으로 팔았다. 시장시세보다 30~40%나 싸니까 인기상품이 되었고 유치원 수위실(증축공사 때 헐림)은 계란판매장이 되었다.
 
농심 어머니교실 개설 농진관의 이미지 제고와 농산물직판 길 열어
지금도 이곳 이촌동에 일본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깨어진 소위 ‘파란’은 일본인 주부들의 차지였다. 몇 십원을 절약하려는 알뜰함에 놀란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 작은 인근주부들에 대한 서비스는 농협중앙회의 하나로마트 및 유기농사업소로 그리고 오늘의 우리마트로 발전(?)을 하였다. 나는 이런 일로 인하여 인근주민들의 추천으로 서울특별시장이 주는 ‘모범시민상’을 받았으니 스스로 부끄럽지만 이 수상은 내 이력서에 써먹고 있다.
농업기술진흥관의 소송이 진행 중에 우리법인의 부총재로 이 사건을 담당한 이재훈 변호사를 통해 원고측 변호사로부터 화의제의가 들어왔다. 나는 일언지하에 ‘…결사항쟁의 각오로 나는 끝까지 갑니다.…’하고 단호하게 화의를 거절하였다. 농업기술진흥관 수호운동을 일으키고 5만명의 서명을 재판부에 제출하고 수호성금을 모는데 동분서주하였다. 건립과 수호성금모금에 동참하여 주신 전국 통일회원동지의 정성과 뜻은 우리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소송의 골자는 ‘증여’와 ‘빼앗는가’가 다툼의 핵심이다. 원고는 피고에게 ‘우리법인은 관변단체로서 정부의 보조나 지원을 받았다고…’고 하였다. 양심에 비취어서 단 한 푼의 특혜라도 받은 사실이 있다면 승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재훈, 이중광 변호사님에게 이글을 통해서 거듭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성천선생님은 대법원에서 이 소송의 최종판결을 못 보시고 서거하신 것이 한으로 남았습니다.
1973년(?)로 기억하고 있다. 성천선생님은 ‘새마을운동’에 책임을 맡고 간여하시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특보(?)로 새마을운동의 실무자로서 기획하고 보필하신 박진환 박사나 새마을운동의 용광로라 할 새마을운동연수원의 김준 원장이 서울농대의 동기(?)생으로 알고 있는데 두 분이 모두 성천선생의 제자란 사실이다. 그리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연수생에게 짧은 시간(4박5일)에 정신교육(나는 교육과 연수를 구별도 못하는 무지렁이 이지만) 위주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나는 뭐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다. 이 연수원을 거쳐 나간 수많은 수료생은 거의가 성천선생의 강의를 들었을 것으로 안다.
필자는 성천선생의 발자취를 돌아 볼 때 역사발전의 관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인 공과는 ‘재건국민운동’과 ‘새마을운동’을 따로 떼어 내어서 평가하여야 한다. 그리고 또한 두 운동은 성천선생에게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성천선생의 사상을 언젠가는 재조명될 것이지만 성천선생은 이 운동에 참여한 동기와 목적은 국민계몽과 국민계도에 있었지 정권과 정치권력에 아부하여 지위나 명예를 얻는데 있지 않았음을 성천선생은 행동으로 입증하고 있다.
 
성천선생은 영원한 큰 스승, 국민 계몽과 계도의 일관된 목적과 행동
그 예를 들자면 우리협회를 영도한 지도력과 업적이 아닌가 말이다. 교사나 교수는 많아도 참스승은 없다고 하는 세상이다. 나는 성천선생으로부터 학점을 따는 강의를 한 시간도 들은 일이 없다. 그러나 대학에서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나 만큼 양적으로 많은 강의를 받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성천선생은 학자로서 학문을 담는 인격을 갈고닦고 더 키우는데 중점을 둔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다. 나 자신은 늘 성천선생의 제자가 되기에는 스스로 학식과 자질이 없고 ‘우직한 머슴’로 자부하고 있는 사람이다.
성천선생의 가르침을 평생을 두고 지켜내고 있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1983년 무렵으로 기억하고 있다. 성천선생님 내외분을 청량리에 있는 우리 집(인천약국)으로 모시고 와서 저녁식사를 대접한 일이 있었다. 성천선생의 대화상대로 선생보다 세 살 아래인 한학에 조예가 깊은 내 자형을 동석시켰다. 화기 넘치는 정겨운 자리였다. 며칠 후 성천선생은 총재실로 나를 부르시고 일전의 회식을 치하하시고 ‘…정 전무! 그날 정 전무의 언행을 보고 놀라서 하는 말인데 부인에게 하대 말을 쓰던데 …오늘 이후 부인에게 존대 말을 쓰라고…’하신다. 이 충언의 말씀에 크게 깨달았다. 이 말버릇을 고치는데 얼마간의 시일이 걸렸다. 그 뒤로 우리 집에는 3형제 부부가 모두 잘 지키고 있다. 부부만이 아니라 상대방에 따라서 달라지만 ‘존대 말은 언어의 가풍으로 정착’ 되었다.
유구한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수많은 스승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오늘의 역사발전은 어찌 되었을까. 영원한 큰 스승! 성천선생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실천하는 일이 성천선생을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고 살려내는 길이다.
 
필자 후기 : 이 글의 모두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협회의 (농업기술회보, 2004년 12월 제494호)와 (농업기술회보, 2005년 9․10월 제501호)의 간과한 역사적인 사실을 보충한 글입니다. 필자는 시각장애1급으로 참고자료나 문서를 읽을 수 없습니다. 글 내용 중에 (?)마크는 기억이 분명치 않아서 붙인 것입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려면 우리법인의 사무실에 보관중인 운영위, 기획위, 이사회 및 총회서류 등 문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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